유자광 김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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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 김일손


훈구파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던 세조, 그런 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 훈구파입니다. 훈구파의 반대개념, 대립했던 파로는 사림파가 있습니다. 사림파는 성종 즉위 이후에 중앙무대에 활발하게 진출하게 됩니다.



훈구파는 세조가 왕으로 오르가 공신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덕분에 더 높은 자리에 등용되었고 나라로부터 많은 토지를 받게 됩니다. 이와 반대인 사림파는 절개와 의리, 명분을 중요시합니다. 명분이라함은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부터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림파가 세조의 입장에서 예뻤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사림들을 모두 쫒아내고 말았지요. 정치적, 학문적으로 입장이 상당히 달랐던 두세력 훈구파와 사림파. 그들의 심한 대립은 연산군, 중종, 명종 때까지 거치며 총 네 번의 사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 사화 중에서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사림인데 사림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유자광 김일손



훈구파 대신이었던 유자광은 계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나보다 잘난 자는 절대 못본다라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예종이 남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던 유자광은 예종에게 남이를 모함하게 됩니다. "전하, 남이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사옵니다"라는 거짓된 정보를 말하게 됩니다. 결국 남이는 억울하게 죽고 맙니다. 반대로 유자광은 예종의 신임을 얻게 되고 일등 공신이 됩니다. 유자광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예종의 신임을 얻고 있기에 유자광과 친하게 지내면 자신에게도 무엇이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한 간사한 무리들입니다. 실제로 유자광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간사한 무리들이었고 뜻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유자광을 멀리했습니다.



함양에 놀러갔던 유자광은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반해서 시 한 편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를 누각의 현판에 붙이게 합니다. 시간이 흘러 사림파였던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사림파과 훈구파는 원수지간이었지요. 당연히 김종직이 유자광을 좋아할리도 없었습니다. 김종직은 유자광이 비겁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며 그를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자광의 시가 적혀있는 현판을 보고 크게 화를 냈습니다. 당장 현판을 떼어내서 불지르게 했는데 이 이야기가 결국은 유자광의 귀까지도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유자광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김종직은 사림파의 거목이었고 주상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유자광은 '두고보자 김종직!' 훗날을 도모하게 됩니다.



김종직은 누구였을까요? 그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세조때, 그의 나이가 28세였을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정에서도 그의 학식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고 난 뒤 김종직은 특히나 성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남효온 등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인재들이 늘 찾아왔습니다. 김종직은 도승지와 이조 참판을 거쳐 형조 판서를 지내게 되면서 사림파의 거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종직에게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새 임금이 되는, 옳지 않은 일을 저질렀을 때 그에 항거하지 못하고 조정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김종직은 세조의 불의한 일을 글로 남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꽤 유명한 것인데 김종직의 '조의제문'입니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라는 의미인데 중국 진나라 항우가 초나라의 왕이었던 의제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것을 세조가 단종위 왕위를 빼앗은 것에 살짝 비유하면서 세조를 비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김종직이 죽은 후 그가 남겼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였던 김일손이 사초에 올리게 됩니다. 사초란 사관이 역사적인 일을 매일 기록한 글을 말합니다. 김일손은 성품이 강직하고 문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김일손은 사관으로서 역사의 편찬을 도맡아 하고 초고를 쓰는 일이 맡아보던 관직에 있었습니다. 그는 나랏일을 처리하는데 대쪽 같았고 훈구파를 비판하는 바른말도 서슴치 않고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사람피와 훈구파가 서로 못잡아먹고는 못사는 그런시기였습니다. 김일손은 이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는 사관일세. 사관이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바른 말을 하겠는가. 역사는 진실이야. 어리신 주상의 총기를 가리는 자들은 모두 없어져야 하네"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한편 이극돈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22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출세를 하여 좌찬성까지 지낸 훈구파에서는 영향력이 막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극돈은 전라 감사로 있었을 대 뇌물 받는 일을 즐겨하였으며 성종 임금의 국상(왕이나 왕세자, 왕비 등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치르는 장례)에서도 기생과 어울리며 술을 바시는 비행을 저지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사관으로서 올바른 역사를 기록해야한다고 주장하던 김일손은 이극돈의 이러한 비행을 사초에 기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극돈은 김일손을 찾아가 사초에 쓴 자신의 이야기를 지워달라고 사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김일손은 "사초는 임금도 손을 못 대는 법입니다"라며 강력하게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앙심을 품게 됩니다. 연산군 때 '성종실록'편찬이 시작되게 됩니다. 성종실록의 편찬을 맡게 된 사람이 이극돈이었습니다. 이 극돈은 이 과정에서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극돈은 옳다를 외쳤습니다.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김일손은 물론이고 사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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