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 루이 16세 처형
- 역사 공부
- 2022. 1. 31.
프랑스 대혁명 루이 16세 처형
프랑스 공화국이 수립되자 루이 16세를 어떻게 해야 할지가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국민 공회에도 두 개의 세력이 있었는데 농민, 빈민, 노동자가 지지하는 급진파와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시민이 지지하는 온건파가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로 탈출하려다 붙잡힌 루이 16세를 재판하는 과정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파는 왕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와 반대로 온건파는 사형만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루이 16세는 외국과 내통하여 국가에 반역한 죄를 물어 사형을 선고받고 단두대에 올라 1793년 1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절대 왕권의 몰락의 순간입니다.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해 10월 같은 곳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루이 16세가 처형된 뒤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잡으면서 프랑스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분위기가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는 서둘러 혁명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급진 세력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동안 농민들을 괴롭혀 왔던 무거운 세금 부담을 없애고 보통 선거를 실시하는 등 과감하게 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거침없이 단두대로 보내 사형시켰습니다. 혁명을 같이 했던 동지들까지 단두대에 세우면서 공포 정치를 이어갔습니다. 단두대는 공포 정치의 상징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도 수십만 명이 되었으며 같은 국민 공회 의원들도 잔뜩 겁을 먹고 눈치를 보기 바빴습니다. 혁명이 약속했던 자유와 평등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혁명을 일으켰던 사람들조차 언제 단두대로 끌려갈지 모르는 신세가 되었으며 이 가운데 하루하루 불안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포 정치가 계속되자 국민 공회 안의 온건파 사람들은 로베스피에르의 독재를 막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로베스피베르와 측근들을 체포하자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신의 적을 수없이 처형한 단두대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측근들도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혁명 달력으로 테르미도르 9일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을 데르미도르의 반동 또는 1794년 7월에 일어났다고 해서 7월의 쿠테타라고 합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잔인했던 공포 정치가 끝나고 프랑스에는 다섯 명의 총재로 이루어진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으며 큰 희생을 치렀지만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인류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던 최고의 권력, 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동시에 성직자와 귀족만 특권을 누리던 모순 투성이 신분 제도와 봉건제 등 낡고 오래된 제도를 무너뜨렸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으 유럽 곳곳, 더 나아가 전 세계로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드디어 프랑스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 나폴레옹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등장한 나폴레옹은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유럽 여러 나라를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의 사상이 유럽 곳곳으로 펴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을 떠나다.
새로 수립된 총재 정부는 힘이 너무도 약했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나라 밖에서는 주변 나라들이 쳐들어올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프랑스는 대혼란의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약해 빠진 정부 대신 나라를 안정시켜 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난세에는 영웅이 나탄나다고 했습니다. 이러할 때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 되겠습니다. 나폴레옹이 파리의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이때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혁명 정부에반대하는 사람들이 툴롱 지역에서 영국군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나폴레옹이 뛰어난 전략으로 반란을 잠재워 버렸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나폴레옹은 치르는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며 순식간에 시민들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유럽의 강국 오스트리아를 물리친 것에 자신감을 얻은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오랜 적수인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이집트를 거쳐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이집트를 차지하면 영국에게 경제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집트를 제일먼저 정복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마침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집트군에 맞서 싸워 힘겹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아부키로 항구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게 크게 지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한 동안 이집트에 갇혀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가 영국,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은 파피로 돌아갔습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한편으론 성과도 있었습니다.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서 수백 명의 학자들을 데리고 가서 그곳의 역사와 유물등을 연구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집트에서 로제타석을 발견하여 프랑스로 가져왔는데 나중에 이것은 이집트 상형 문자의 비밀을 푸는데 중요한 열세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