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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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


산수화는 풍경을 담은 그림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정선이 있는데 1676 ~ 1759년까지 살았습니다. 부채의 면을 선면이라고 하는데 부채의 면에 정선이 금강산을 그렸고 이를 선면금강내산도라고 합니다. 1707 ~ 1769년까지 살았던 심사정은 김홍도와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의 나이 20세 정도에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풀이나 꽃, 벌레, 동물 등을 특히 잘 그렸고 풍경을 그리는 산수화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심사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강상야박도가 있는데 숲에서부터 먼 산으로까지 시선이 옮겨지도록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화법이었지요. 심사정의 스승이었던 정선이 우리나라 화법을 개척했다고 하면 심사정은 중국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1712 ~ 1786년까지 살았던 최북도 있었습니다. 최북은 특히 메추라기를 잘 그려서 최메추라기라고 불렸는데 참 재미있는 일화이빈다. 뿐만 아니라 산수화까지도 잘 그려서 최산수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여행하면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지방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팔고 여행 경비를 마련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호는 호생관인데요 이를 풀이하면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고 하지요. 괴짜 화가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화가도 있는데요  1843 ~ 1879년까지 살았던 장승업이 있습니다. 조성 말기 화가로 동물이나 풍경, 인물 등 골고루 잘 그린 화가로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함께 삼원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붓놀림은 대담했고 사람이나 집을 그릴 때는 간결하고 소탈하게 그리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림에 붓글씨를 쓸 때에는 자유로운 그의 성격이 고스란이 묻어나고는 했습니다. 장승업은 고아로 자라 남의 집 머슴으로 살았지만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엇기에 궁중 화원이 되었습니다.

 

애국계몽운동



이번에는 온나라에 펼쳐친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답니다. 아니 우리나라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데 지들 마음대로 식민지를 결정하다니요, 이런 상황이 되자 국권을 되찾기 위한 방법으로 국민을 일깨워서 나라의 힘을 기르자라는 운동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애국 계몽 운동입니다. 1899년에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애국 계몽 운동 단체가 생기게 되는데 가장 먼저 조직된 것이 보안회입니다. 보안회는 일본이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간권을 달라고 생떼를 쓰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후에 애국계몽운동단체가 또 만들어지게 되는데 헌정연구회입니다. 대한 자강회로 발전해서 적극적은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 정부에게 빚을 지게 하여 그 빛을 갚을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국민들은 힘을 모아 나라의 빚을 갚자는 운동을 펼치지만 일제의 탄압은 점점 심해지고 그 상황에서 비밀리에 신민회가 조직됩니다. 신민회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간권을 빼앗으려는 이유는 그거 하나면 일본의 식량과 원료 부족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땅의 3분의 1이 황무지였는데 아무 대가도 없이 황무지를 넘기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그야말로 도둑놈 심보였습니다. 이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드러내놓고 우리나라를 지배하겠다는 야욕이었습니다. 황무지라는 것은 아직 개관되지 않았고 주인 없는 땅을 말하는 것인데요 일본의 속마음은 우리 땅을 마음대로 쓰겠다는 속셈이 담겨있었습니다.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기 위해서 1904년 7월에 보안회가 만들어집니다. 보안회는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게 절대 넘길 수 없다는 반대운동을 했습니다. 보안회가 집회를 열자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종로로 모여들었습니다. 상점들도 문을 닫고 참여했으며 사람이 많아서 전차가 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부와 일본 공사관은 물론 해외 공사관에도 편지를 보내서 일본의 야옥을 만방에 알리자는 집회였습니다. 일본은 헌병, 경찰을 보내서 보안회 사무실에서 간부를 체포했지만 국민들의 애국계몽운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보안회는 날마다 집회를 열었고 일본 공사관에 편지를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항쟁하여 황무지 개간권을 지킬 수 있었는데요 보안회는 외국인에게 땅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아낸 뒤에 스스로 해산했습니다. 나라에서도 결국 보안회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보안회가 해산을 하자 이준이 중심이 되어 1905년 헌정 연구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헌정 연구회는 입헌 군주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맞서는 조직입니다. 헌정 연구회는 정치 의식과 독립 정신을 높이기 위한 단체로 민족을 배반하는 일진회를 규탄하고 해산하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1905년 11월에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강제적으로 을사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 조약으로인해 우리나라의 주권은 일본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국민들은 나라의 위기를 국민의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민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국민을 교육해야하고 실력을 쌓아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애국 계몽운동이라고 합니다. 외세의 침략이 거세지자 애국 계몽 운동은 국권을 되찾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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