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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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의 주된 활동은 학교를 세워 독립 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안창호의 이러한 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은 이숭훈은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웠으며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대성 학교는 체육 시간에 학생들의 체력을 키우게 했고 군사 교육도 받도록 하였습니다. 대성학교는 1908년에 안창호가 중등 교육기관으로 세운 학교입니다. 교육에만 신경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민회는 일본의 경제적 침략이 심각해지자 민족의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쏭 이에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우고 도자기를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판 사업도 하였는데 안창호는 책이 국민의 생각을 키운다고 생각하여 태극 서관이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줍니다. 청년 운동도 이어지는데 앞날을 내다볼 때 젊은 세대들이 나라를 되찾는 일에 참여해야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1909년에는 청년 학우회를 만들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밤낮으로 목숨을 바쳐가며 노력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침략을 더 거세지게 됩니다. 신민회도 일본의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일본은 처음부터 뿌리는 내리지 못하게 막아야했지요. 이무렵 1907년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대한 제국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게 됩니다. 일본은 안창호를 비롯해서 신민회 간부들이 당연히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였고 그들을 체포했으나 상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져 모두 풀려나게 됩니다. 일본은 신민회를 더욱 철저히 감시하게 됩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독립 운동이 힘들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국내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동지는 나라 밖에서 운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만주 서간도로 옮겨가 독립 기지를 건설하기로 합니다. 독립운동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서간도로 이주했으며 우리 민족의 집단 거주 지역이 만들어지고 농장을 만들어 경제력을 키우고 독립군을 기르지 위해 신흥강습소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11년에 105인 사건이 벌어져 국내에 있던 회원들이 체포되었고 결국 신민회는 해체되고 맙니다. 105인 사건은 일본이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일제가 1911년에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을 체포한 사건으로 공판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명이라서 105인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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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던 단체들에 대해 다시 정리해보도록 합니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을 막기 위해 1904년 7월 송수만, 원세성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는 보안회로 일본이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간권을 강요할 때 적극적으로 반대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준, 양한묵 등을 중심으로 1905년 5월에는 헌정 연구회가 조직됩니다. 국민의 정치 의식을 높이면서 입헌 정치를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나라를 배반한 일진회를 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대한 자강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대한 자강회는 교육을 토앻 민족의 힘을 기르고자 노력하였으며 애국 계몽 운동을 펼치고 고종 황제 퇴위 반대시위를 벌였지만 결국 어린 순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07년에 해산되고 맙니다. 일본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국민들이 똘똘 뭉쳤던 국채 보상운동이 있습니다. 일제가 강제로 우리 정부에게 돈을 빌려 쓰라고 하였고 높은 이자를 불러서 갚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를 지배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1907년 2월 대구에 살던 서상돈의 제의로 빚을 갚자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금주와 금연 등으로 모금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국민 대회를 열고 국채 보상 기성회를 설립하면서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고 호응하게 됩니다. 여자들은 비녀를 내놓기도 하고 기생들은 가락지를 내놓았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도 실패하게 됩니다. 1907년 안창호와 양기탁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 항일 운동을 이끈 신민회도 있습니다. 그들은 국권을 되찾고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신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와 소년을 펴냈고 평양에는 대성학교,정주에는 오산 학교를 세워 청년들의 교육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자기 회사를 세웠으며 출판 사업, 1909년에는 청년 학우회를 결성하였고 1909년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간도에 독립운동기지까지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조작이었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마저 해체되고 맙니다.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이 들어오면서 언론 기관이 만들어지고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기 시작합니다. 언론 기관은 대국 계몽 운동이 일어날 때 국민을 계몽하고 여론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박문국을 세우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었던 한성순보를 발간하게 됩니다. 최초의 민간 신문은 독립신문으로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되어 민족의 자주 정신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영국인 베델은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였는데 이는 신민회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황성신문, 제국 신문 등이 발간되는 등 언론 기관의 활동이 펼쳐지는 시기였습니다. 1882년 박영효는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게 됩니다. 수신사는 조선 시대 때 일본에 파견하던 사신을 말하는 것으로 원래는 통신사라고 불렀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두 나라가 동등한 입장에서 외교 사절을 교환한다는 의미로 수신사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박영효는 수신사로 일본에 가서 일본의 개화된 문물을 견학하고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일본이 개화된 데에는 신문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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