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삼국의 중심으로 우뚝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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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삼국의 중심으로 우뚝 서다.




한반도의 남동쪽, 구석진 곳에 있던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뒤늦게 발전했다. 동쪽에 있었기에 서쪽에 있던 중국과 교류하기 힘들었고, 지방 세력이 강한 신라는 왕의 권한이 약한 탓도 있었다.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지증왕, 법흥왕 때 발전을 시작하였으며 신라의 전성기는 진흥왕 때로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한다. 제 22대 신라의 왕이었던 지증왕, 신라는 농업이 크게 발전했다. 이때 우경이 시작되었는데 소를 이용해서 밭을 가는 것이다.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농업의 생산력이 크게 좋아졌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또한 지증왕은 왕이 죽으면 노비까지 함께 묻는 순장 풍습을 없앴고, 나라 이름, 권력자를 부르는 호칭도 정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라, 사로, 서라벌, 신라 등의 이름이 너무 많았다. 그 중에서 선택된 이름이 바로 신라이다. 신라에서의 '신'은 덕없이 날로 새롭다라는 의미이고 '라'는 사방을 아우른다는 뜻이다. 마립간이라는 호칭을 없애고 드디어 '왕'이라는 존호도 사용하게 된다. 당시 왕이라는 것은 중국에서나 쓸 수 있는 것이라 여겼었다. 그래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거서간 - 이사금 - 마립간으로 부르던 것을 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때가 503년이다.


신라, 삼국의 중심으로 우뚝 서다.

 


"국호는 신라로 하고 마립간 대신 왕이라 한다."
지증왕 재위 13년, 512년의 일이다. 우산국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는 이유의 신라를 따르지 않으니 이사부는 군사를 이끌고 우산국을 토벌토록 지증왕은 명령했다. 우산국은 지금의 울릉도이다. 신라의 이사부 장군은 사자모양을 나무로 만들어서 배에 많이 싣도록 했다. 그리고 우산국으로 건너가 항복하지 않으면 배에 있는 사자를 푼다고 협박했다. 섬에 살던 우산국 사람들은 사자를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공포에 질렸다. 그후 우산국은 매년 신라에 토산물을 바치게 된다. 많은 업적을 이룬 지증왕이 죽고 법흥왕이 왕위에 오른다. 법흥왕은 중앙 집권 국가체제를 완전히 갖추게 한 왕이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려면 제대로 된 법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중국의 율령을 고쳐서 신라에 맞게 만들었다. 율령(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니 신라의 질서는 서서히 잡혀가게 된다. 527년에는 드디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백성들은 정신적인 통일을 이루었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제 23대 왕인 법흥왕 때인데 이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일찍이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와 백제는 날로 발전하고 있었기에 법흥왕도 불교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대가 거셌다. 불교를 받아들일 수 없어 시름에 가득한 법흥왕을 충신이었던 이차돈이 찾아왔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겠다는 계책이 있다고 한다. 다음날부터 이차돈은 절을 짓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숭배해왔던 하늘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곳이었다. 그런 곳이었던 천경림에 절을 짓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화가 났다. 귀족들이 이차돈을 몰아가자 이차돈은 왕의 명령이라며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신하들은 법흥왕에게 달려와 이차돈을 시켜 절을 짓게 하였는지 따지고 든다. 하지만 법흥왕은 모르는 일이라며 당장 이차돈을 잡아오라고 한다. 법흥왕은 이차돈을 불러 언제 절을 지으라고 명했느냐며 이차돈을 죽여버린다. 이차돈을 죽인 후 법흥왕은 말한다.  " 앞으로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모두 이차돈처럼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본 귀족들은 법흥왕의 기세에 눌렸고 법흥왕은 이 기세를 잡아 절을 계속 짓게 만든다.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었으며 율령이 반포되었고 이제 국가로서 당당하게 올라서게 된다.



한강을 차지한 신라
지증왕 때 우산국을 정벌하고, 나라 이름은 신라가 되었으며 왕이라는 칭호가 생겼다. 법흥왕 때 비로소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이 반포되었다. 지증왕과 법흥왕 때 발전이 시작된 신라, 이제 진흥왕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고구려는 전성기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지나 나라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백제는 성왕이 올라 수도를 사비로 옮겼으며 중흥을 꾀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흔들리자 백제는 어떻게든 한강을 되찾고 싶어했으며 이는 나제 동맹을 맺었던 신라와 손을 잡으면서 실행에 옮기게 된다. 백제와 신라는 힘을 모아 고구려를 친다.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 신라는 한강 중상류 지역을 차지했다. 하지만 진흥왕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진흥왕 재위 14년, 553년에 진흥왕은 나제 동맹을 깨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고 만다. 140년 동안 계속되어온 동맹을 깨버린 신라, 이에 분노한 백제 성왕은 신라를 공격하지만 오히려 싸움에 지고 전사하고 만다. 고구려 역시도 다시 한강을 빼앗기 위해 신라를 치지만 이제 신라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기세 등등한 신라는 남쪽의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낙동강까지 차지한다. 북쪽으로는 고구려 당이었던 함흥지역까지 진출한다. 진흥왕은 영토를 넓히면서 새로 차지한 땅에 군대를 두었고 수비를 철저하게 했다. 진흥왕의 활발했던 정복 사업은 1개의 적성비, 4개의 순수비를 통해 알 수 있다.



단양 적성비
순수비 :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영토를 크게 확장한 진흥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화랑도를 국가조직으로 개편했고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신라 역사 요점 정리
6세기 초 지증왕 : 우경 실시, 순장풍습 폐지 나라 이름은 신라, 왕호를 '왕'으로 고침 우산국 정복



6세기 법흥왕 : 율령 반포 - 왕권강화 불교를 공인하여 백성의 정신적 통일



6세기 진흥왕 : 신라의 전성기 한강유역 차지, 대가야 정복, 함경도 지역 진출 단양 적성비, 4개의 진흥왕 순수비 국사 편찬 화랑도 개편, 국가적 조직으로 확대, 삼국통일에 이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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