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와 스파르타
고대 그리스와 세계의 형성
기원전 2천년쯤 그리스 본토와 가까운 섬 크레타에는 청동기 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문명이 그리스 문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 이후 기원전 팔백년전쯤에 그리스에는 폴리스라는 도시국가가 생성되었으며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세계 최초의 도시문명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그리스 땅에 세계문명이 시작되기 전 가장먼저 시작된 곳은 에게라는 곳이라고 합니다. 처음들어 본 지역인데요. 유럽의 가장 동쪽에 있어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의 발달된 문명이 이곳으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에게 해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많은데 이중 대표적으로 크레타 섬으로 가장 큰 섬입니다. 기원전 2천년쯤부터 이곳에 살아온 섬사람들은 이 일대를 주름잡아 왔다고 합니다. 크레타 섬에 사는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일찍이 무역을 하며 많은 부를 쌓았고 큰 발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당시 크레타 섬이 얼마나 발전한 문명인지 알수있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바로 크로노스 궁전입니다.
크로노스 궁전에는 배수시설이 완벽하고 수 백개의 방이 있고 좁은 복도와 계단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궁전 안에는 화려한 금과 은 등으로 만들어진 세공품과 곡식을 보관하던 항아리가 남아있으며, 벽에는 돌고래, 황소, 여인의 모습 등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이 크레타 섬의 문명의 발달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특히 크레타 섬은 군사적으로도 힘이 막강하여 외적의 침입을 따로 걱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막강한 섬의 주인공은 바로 미노스 왕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신화속의 인물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문명이 발견이 되어 이제는 실존인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크로노스 궁전을 보면 얼마나 발전한 문명인지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발견했을 당시 세계를 떠들썩 하게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발전했던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1400년경 갑자기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자연의 힘 바로 주변 섬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화산재로 인하여 문명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화산폭발을 피해서 하나둘 사람들이 떠나니 당연히 크레타 섬은 군력이 약해졌으며 이 틈을 타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라는 곳에서 온 사람들이 크레타 섬을 점령하였다고 합니다. 크레타 섬을 정복한 미케네 사람들은 크레타 섬에 남아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살았으며 이들의 선진문명을 잘 받아들여 더욱더 발전했다고 합니다.
트로이 전쟁의 시작
말로만 듣던 대 서사시 전쟁 바로 트로이 전쟁의 시작입니다. 크레타 섬을 점령한 미케네 사람들은 해가 거듭할수록 막강해지며 활발한 무역을 펼치며 세력을 뻗어 나갔습니다. 트로이 전쟁은 시인 호메로스가 지은 글에는 미케네와 트로이의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미케네가 막강해지면서 벌어지는 전쟁이라고 합니다. 더 넓은 바다로 무역을 하고 싶었던 미케네 사람들은 해가 거듭할수록 에게 해를 넘어 흑해까지 자신들의 무대로 만들고자 하였는데 하지만 흑해를 가지기 위해서는 길목에 있는 트로이를 반드시 무너뜨려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리스 연합군을 조직하여 트로이를 쳐들어 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전쟁은 10년동안 지루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전쟁이 너무 길어지자 그리스 연합군을 잔꾀를 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가 되겠습니다.
거대한 나무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성문 앞에 놔둔 뒤 후퇴하는 시늉을 펼치며 동태를 살피다가 저녁 때 쯤에 목마안에 있는 그리스 연합군이 성문을 열어 축제를 열고 있는 트로이를 기습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결국 트로이의 몰락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신화로만 알고 있었는데 독일인인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사람은 실존전쟁으로 생각하고 평생을 트로이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1870년쯤에 마침내 트로이 유적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정말 인간승리가 따로 없습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미케네는 반짝 번영을 뒤로 하고 점점 쇠퇴 하였으며 더 나아가 기원전 1200년쯤에 그리스 북부에 있는 도리아 사람들에게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고 합니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첫 발걸음
그리스에는 높은 산이 많아서 다른 나라와 교류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일된 큰 나라를 세워지지 못하고 인구가 얼마되지 않는 작은 도시국가가 생겨났는데 바로 폴리스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거친 땅을 피하고 비옥한 땅을 찾아 터전을 마련하고 폴리스 마다 성벽을 쌓아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았다고 합니다. 그중 중심 아크로폴리스라는 언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앙의 언덕인 아크로폴리스에는 신을 모시는 신전을 만들었으며 그 아래에는 광장인 아고라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그리스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스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폴리스라는 도시국가에 살았지만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같은 신을 모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올림피아 제전을 열었다고 합니다.
지금 올림픽의 시초라고 보면 됩니다. 올림피아 제전은 그리스 사람들이 섬기던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제사였다고 합니다. 시낭송과 운동경기로 신을 찬양하고 그리스 사람들끼리 단결을 다졌다고 합니다. 특히 올림피아가 열리는 동안에는 전쟁이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때당시 주요 경기로는 창던지기, 멀리뛰기, 레슬링, 원반던지기, 달리기 등 지금도 하고 있는 스포츠 종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 기원 올림피아 제전 알면 알수록 재밌습니다.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아테네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중 대표는 바로 아테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테네도 처음에는 다른 도시국가처럼 왕이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이웃 폴리스들과 전투를 치르며 힘을 키워 나갔는데 이로인해 부유한 귀족들이 무기를 사서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귀족들이 자연스럽게 힘이 막강해져 결구 권력을 귀족들이 잡게되었습니다. 또한 바다에서 무역일을 하며 돈을 번 부유한 평민들도 많이 생겨 이들또한 스스로 갑옷과 무기를 마련하여 전쟁에 참여하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자연스럽게 평민과 귀족들 중심으로 권력이 양분화 되어 나랏일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621년전쯤에는 드라콘이라는 사람들 즉 평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법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드라콘 법전이라고 합니다. 이제 귀족만 볼수 있는 법전이 아닌 누구나 다 볼수 있는 법전이 만들어져 민주주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법전들이 너무 가혹하여 피로 쓴 법전이락 불리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예로들어 물건을 훔치다 걸리면 바로 사형에 처하는 식이였습니다. 정말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바로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솔론입니다. 흔히들 솔로몬제왕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훌륭한 성품으로 평소에도 아테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온 인물입니다. 당시에는 귀족에게 돈을 빌렸다가 못 갚으면 그의 노예가 된 평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솔론은 이를 막기위해 가나한 농민들의 빚을 줄여 주었고 평민들 또한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제도를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어진 아테네는 혼란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틈을 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무력으로 아테네를 점령하고 독재정치를 펼쳤다고 합니다. 그는 솔론과는 달리 평민의 위한 정치를 하는 척하고 실제로는 왕 노릇만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몇 십년 뒤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네의 새 지도자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귀족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행정구역을 다시 짰고 500인 평의회를 설치하여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 할 수 있게끔 제도를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클레이스테네스는 독재자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도편추방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이 제도는 참주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적어 내도록 한 뒤, 6천표를 넘게 받은 사람을 10년동안 아테네에서 추방시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치는 5세기에 들어서 완성되었는데 이 시기를 이끈 분은 페리클레스로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나랏일을 함께 결정하고 투표할 수 있는 직접적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시민이 참석하는 회의인 민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으며 전쟁이나 국가예산을 결정짓는 일 또한 같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시초인 아테네 또한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자, 노예, 외국인에 대한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용감한 전사 폴리스 스파르타
아테네와 더불어 막강한 도시국가인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생활방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고 합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북부에서 온 도리아 사람이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국가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통제하였고 군사 훈련을 혹독하게 하여 남자들을 용맹한 전사로 길러 냈다고 합니다. 영화 300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훈련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이러한 교육 체계를 만들어 낸 사람은 전설적인 인물인 리쿠르고스라고 합니다. 그는 스파르타를 강한 도시국가로 만들기 위해 여러 방법을 찾다가 이러한 엄격한 체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는 아이가 태어나면 신체검사를 통하여 건강하면 키우고 그렇지 않으면 동굴에 버리도록 지시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강한자만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가까스로 첫 시험을 통과하면 아이들에게는 더욱더 혹독한 길이 남아있는데 일곱 살이 되면 부모의 곁을 떠나 단체생활에 들어갔으며, 이때는 머를 짧게 자르고 속옷 없이 옷 한 벌로 일년을 지내야 했다고 합니다.
신발도 신지 못하고 밥은 한상에 모자라게 주어 각자 알아서 배고픔을 해결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배고프면 어떻게든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라는 스파르타식의 교육방법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리고 스무살이 되면 군인이 되어 10년동안이나 고된 군사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교육방식에는 여자도 남자들처럼 강하게 자라도록 교육받아왔다고 합니다. 바로 건강한 몸으로 건강한 전사를 낳아 전사로 키우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남자들이 전쟁이 나가있는 동안 원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를 제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강압적인 교육방식을 스파르타 식 교육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영화 300에서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요즘같은 세대들에게는 또한 필요한 교육의 방식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한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